관세화 예외를 위한 공동전선 형성과 협정문 작성에 적극 참여하다

GATT 사무국은 브뤼셀 각료회의(90.12.3∼7) 실패 후 협상재개를 선언(91.2.6)하고 종래 14개의 협상그룹을 7개 그룹으로 재편성하고 가장 걸림돌이 되고 있는 농업협상은 Dunkel 총장이 직접 의장을 맡아 합의 도출을 위한 기술적 협의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는 의욕적으로 91년 3월부터 6월까지 6차례의 회의를 강행하여 의견차를 좁히는 노력을 시도하였다. 특히 가장 큰 견해차를 보이는 시장접근분야 그중에서 관세화를 반대하는 한국, 일본, 캐나다, 스위스 등과 관세화를 고집하는 미국, 호주 등의 의견을 조율하는데 집중하였다.

한편 농림부는 91년 초 조일호 통상국장을 새로 보임하여 반대만을 위한 수세적 입장에서 협정문안 작성 등에 적극 참여하는 공세적 입장으로 전환키로 하고 먼저 관세화 반대 국가의 공동 전선형성을 위하여 최용규(필자) 과장을 일본과 캐나다에 2차례에 걸쳐 파견(91. 4월, 5월초)하여 항후 제네바에서의 3국 공조를 이끌어 내는 한편, 91년 5월 중순부터 시작된 시장접근 회의에서 3국의 대표(한국: 조일호 국장, 일본 : 아즈마 국제부장, 캐나다 : 기포드 국제국장)는 사전에 관세화 예외조항 반영을 위한 논의를 구체화하였다. 

한국(조 국장)은 관세화를 기본원칙으로 받는 대신 원칙에서 의무일탈(derogation)하여 본문 부칙으로 처리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일본(아즈마 부장)은 본문에 단서를 붙이는 방안을 제시하자, 캐나다(기포드 국장)는 자국 법제담당 전문가의 의견으로 다자협상에는 단서나 부칙예가 없으며 그렇게 할 경우 각국의 애로사항을 끼워 넣기 하는 현상이 속출하여 누더기 문서가 될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미국 등 수출국들의 반발이 거셀 것이 예상됨으로 특수상황에 한정해 협정문의 별도 부속서(Annex)로 접근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세 사람은 향후 협상에서 캐나다의 제안을 공동 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조 국장은 박수길 대사에게 이를 설명하고 박 대사는 협정문안 작성에 직접 참여하는 이성주 참사관에게 적극 대응토록 하였다. 실제 2년 후 합의한 UR 최종협정문(93.12.15)에는 캐나다가 제안한 부속서 형태로 일본(부속서 A)과 한국(부속서 B)의 쌀이 반영되었다. 그러나 기존 GATT 조항(11조 2항 C)의 예외가 반영되지 못함에 따라 실 제안자인 캐나다는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결과가 되었다.

던켈 총장, 논의 결과 협상대안서(Options Paper)로 제시

                - 관세화의 예외 인정 -

91년 3월부터 6월까지 격렬한 논의 결과를 의장인 던켈 총장이 요약하여 시장접근분야에서 세 가지 선택지 형태로 협상 대안서(Options Paper)로 91.7.30 개최된 고위급 회의(TNC)에 제출하였다. 즉 ▲1안: 관세화 예외는 없다(미국, 호주 등 수출국들 주장) ▲2안: 일정기간 유예 후 관세화 한다.(스위스, 오스트리아 주장) ▲3안: 항구적인 관세화 예외로 한다(한국, 일본, 캐나다 주장) 등 3개안(Option)이다.

던켈 총장은 최종안으로 3개안중 하나를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일단 우리로서는 그동안 줄기차게 주장한 관세화 예외가 하나의 대안으로 반영된 것에는 성공하였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UR이 끝나는 마지막 단계까지 3안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스위스가 제안한 2안, 즉 일정기간 유예 후 관세화 하는 양극단안의 중재적 성격의 방안이다. 실제로 최종협상단계까지 3안주장을 한 한국과 일본만이 중간안인 2안의 혜택을 본 것이다. 

물론 던켈 총장은 91. 12. 20 고위급회의에 제시한 최종 협상문 초안(Draft Final Act)에는 예외 없는 관세화인 1안을 선택 제시하였다. 그는 최종합의를 목적으로 자신이 만든 안을 밀어붙였으나, 관세화 예외가 없는데 대한 한국, 일본의 반대는 물론 협상 주역중 하나인 EC도 전반적인 불만으로 반대(주로 프랑스)함으로 협상은 또다시 연기라는 다른 국면을 맞게 되었다.

농협의 '쌀 개방 반대 천만인 서명운동', 협상에 큰 도움

이 단계에서 협상과정에 정부가 아닌 민간의 활동이 크게 도움을 준 사례를 하나 들어야 하겠다.

91년 10월 마지막 실무협상(10.29∼30)을 다녀온 조일호 국장으로부터 협상진행 상황을 듣게 된 한호선 농협중앙회장은 긴급 임시 대의원회의(91. 11.9)를 소집하여 11월 11일부터 10일간 쌀 개방 반대 백만인 서명운동을 결정하고 서명을 시작한 10일간에 222만 3천명의 큰 호응을 얻자 이를 연장하여 서명종료 12월 22일에는 1천 4백만에 가까운 엄청난 결과(13,893,500명)를 가져왔다.(이는 1992년 6월 11일자 기네스북에 “최단 시일 내 최다서명”의 기록으로 등재됨) 쌀 개방에 대한 국민들의 적극적 호응이었다. 

한 회장은 이 결과를 가지고 내외신 기자 회견과 GATT 사무국에 직접 사본을 전달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특이한 점은 91년 11월 21일 제네바에서 마지막 4개국(미국, EC, 일본, 한국) 비공식회의에서 던켈 총장이 한국의 서명 운동을 거론하면서 그 숫자(당시 222만명)이면 스위스에서 헌법 개정도 가능하다고 언급하면서 관심을 보였다.

그 후 우리 대표단은 이 서명 결과를 협상 끝날 때까지 상대국 설득에 적극 활용하였으며 이는 결국 우리 쌀의 20년의 장기간 유예 후 관세화라는 특례 조치를 얻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본다.